오래전, 주방 한구석마다 자리 잡고 있던 기름이 있습니다. 비싼 버터나 식물성 기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돼지기름, 라드(Lard)**였죠. 지금은 건강을 해친다는 오해 속에 잊힌 라드. 하지만 사실은, 라드는 오랫동안 인간의 식문화 속에서 가장 사랑받은 기름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돼지고기 지방과 라드에 대한 오해를 풀고, 왜 다시 주목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왜 라드는 다른 고기 지방보다 대중화될 수 있었을까?
라드가 대중적으로 널리 상품화되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돼지가 워낙 키우기 쉬운 가축이었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초식동물인 소나 양과 달리 잡식성이기 때문에, 다양한 음식물 찌꺼기나 곡물 사료로도 잘 자랐습니다. 성장 속도도 빠르고, 번식력도 뛰어났기에 단기간에 많은 지방을 얻을 수 있었죠. 도살 과정에서 얻는 지방량도 풍부했고, 부드럽고 중성적인 맛을 가진 라드는 다양한 요리에 쉽게 어울렸습니다. 특히 19세기~20세기 초반까지, 식물성 기름(대두유, 옥수수유 등)이 대량 생산되기 전까지는 라드가 가장 값싸고 안정적인 조리용 지방이었습니다. 버터보다 싸고, 오래 보관할 수 있고, 고온에서도 안정적이니, 라드는 자연스럽게 전 세계 가정과 레스토랑의 주방을 점령하게 됩니다.
라드에 대한 오해의 시작
라드(lard)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20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는 심혈관 질환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학계와 보건당국은 식단과 질병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안셀 키스(Ancel Keys) 박사가 주도한 '7개국 연구'는 포화지방 섭취가 많은 나라일수록 심장병 발병률이 높다는 결과를 제시했고, 이로 인해 '포화지방 = 심장병의 주범'이라는 단순한 도식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라드는 동물성 지방이고 포화지방 함량이 높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해로운 기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프레임에 상업적 전략이 더해졌습니다. 마가린과 식물성 기름 산업은 이 기회를 활용해 자신들의 제품을 라드와 버터의 '건강한 대체재'로 포지셔닝했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광고와 요리책,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하얗고 깨끗한 기름’, ‘무향무취의 건강한 기름’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것입니다. 대표적인 제품이 바로 ‘크리스코(Crisco)’ 같은 부분경화유, 즉 트랜스지방이 다량 포함된 공업적 식물성 기름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트랜스지방은 라드보다 훨씬 해로운 물질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거나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지방에 대한 공포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학교 교육과 다이어트 책, 의료 캠페인에서까지 ‘지방은 무조건 나쁘다’, ‘특히 동물성 지방은 위험하다’는 메시지가 반복되었고, 결국 한 세대 이상을 거치며 라드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감정적 혐오의 대상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오해는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포화지방과 심장병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으며, 라드에 포함된 올레산(오메가9), CLA(공액리놀레산), 고온에서도 안정적인 산화 저항성 등이 주목받고 있다. 조리용 지방으로서의 실용성은 물론, 건강한 지방 공급원으로서의 가능성까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라드에 대한 나쁜 인식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이론과 상업적 이해관계, 그리고 반복된 대중 교육의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돼지 지방의 성분과 건강
돼지 지방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지방입니다. 단순히 "포화지방 덩어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면들이 많습니다.
- 포화지방: 약 40~45%
- 단일불포화지방(올레산, 오메가9): 약 40~45%
- 다가불포화지방(주로 오메가6): 약 10%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올레산(오메가9)**의 비중이 높다는 것입니다. 올레산은 올리브유의 핵심 성분으로, 심장 건강, 염증 억제, 혈중 지질 개선에 도움을 주는 지방산입니다. 즉, 돼지고기 지방은 단순히 나쁜 포화지방 덩어리가 아니라, 건강에 긍정적일 수 있는 단일불포화지방이 매우 풍부한 지방이라는 것이죠. 물론 과다 섭취는 어떤 지방이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적당량의 라드는 오히려 건강한 지방 공급원이 될 수 있습니다.
기르는 방식에 따른 돼지 지방의 변화
돼지가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먹고 자랐느냐에 따라, 돼지고기 지방의 품질과 성분은 달라집니다. 공장식 사육 돼지는 주로 옥수수, 대두박 등 고열량 곡물 사료를 먹습니다. 이 경우 지방 속 오메가6 비율이 올라가고, 올레산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아집니다. 자연 방목돼지(예: 스페인 이베리코 흑돼지)는 도토리(아콘), 올리브, 자연 목초를 자유롭게 섭취합니다. 이런 경우 지방 속 **올레산 함량이 50~55%**까지 올라갑니다. 심지어 이베리코 돼지 지방은 **"걸어 다니는 올리브"**라고 불릴 정도로, 올리브유 못지않은 건강한 지방 프로필을 가집니다. 이베리코 돼지의 경우, 지방이 단순히 부드럽고 풍부한 맛을 넘어, 건강에 긍정적일 수 있는 고급 불포화지방의 보고가 되는 것이죠. 결국 돼지의 지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돼지고기'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과 먹이로 길러졌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라드로 조리할 때의 장점과 단점
라드는 조리용 지방으로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연점이 높아(약 190~200℃) 고온 조리, 특히 튀김이나 구이에 적합합니다. 고온에서도 산화가 잘 일어나지 않고, 트랜스지방 생성 위험도 낮습니다. 라드로 요리하면 고소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특히 파이, 타르트 같은 제과류에서는 버터보다 더 부드럽고 바삭한 크러스트를 만들어냅니다. 풍미가 중성적이어서 어떤 재료와도 충돌하지 않고, 튀김, 구이, 제과, 심지어 채소 볶음까지 두루 활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칼로리가 높아 과다 섭취 시 체중 증가 위험이 있으며, 오래된 라드는 산패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선한 고품질 라드를 적당히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돼지기름, 다시 주목해야 할 이유
라드는 단순한 '기름지고 해로운 지방'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온 조리, 풍미 강화, 그리고 생각보다 건강한 지방산 구성이라는 탁월한 장점을 가진 전통 식재료입니다. 물론 현대인의 식단에서는 칼로리, 지방 섭취량 조절이 중요하지만, 가끔은 자연에 가까운, 잘 만들어진 라드를 이용해 진짜 맛있고 건강한 요리를 해보는 것도 멋진 선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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